처음 태어났을 때 머릿속은 백지나 다름없다. 로크는 인간이 빈 서판으로 태어나며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했는데, 그만큼 사는 동안 쓸 것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루에도 수백 가지를 경험하면서 뇌는 수많은 것을 익힌다. 2~6세 사이에는 하루에 단어를 8개씩 익혀서 6세가 되면 대략 1만 3,000개의 단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번 담은 정보가 죽을 때까지 저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너무 잘 기억하는 것도 괴롭긴 하지만 말이다.
대뇌에 입력된 정보는 기억의 형식으로 저장되지만, 단기 기억에서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는 것은 소수다. 장기 기억으로 남은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날아가 버린다. 줄까지 그어 가면서 외운 내용인데 다음 날이면 전혀 생각이 안 나고, 일주일만 지나면 '도대체 왜 여기에 줄을 그었는지, 내가 그은 것은 맞는지' 의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학습과 기억의 경험이다.
나이가 들면 머릿속에 있는 기억이 제대로 인출되지 않고, 새로운 정보가 입력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워진다. 전화를 받고 잘 응대해 놓고도 누구와 전화했는지 기억나지 않고, 매일 가던 동네 슈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헷갈린다. 손자의 이름이 헷갈리고, 물건을 흘리는 일이 잦아진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기에는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다. 머릿속에 정보를 집어넣으면 바로 지우개로 지워지는 듯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노화의 일환으로 기억력의 저하가 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이상의 인지 기능, 실행 능력의 저하가 의식의 저하 없이 점진적으로 진행될 때 그 사람은 '치매(dementia)'의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높아지는 치매 위험
나이가 많아질수록 치매의 위험은 높아진다. 미국의 통계를 보면 65세 이상에서 5퍼센트, 85세가 넘으면 20~40퍼센트까지 늘어난다고 한다. 한국은 65세 이상에서 8.2~10.8퍼센트 정도로 추정된다. 2008년 세계 보건 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78.5세였고, 65세 이상 비율은 2010년 11.0퍼센트, 80세 이상은 1.9퍼센트였다. 2050년에는 65세 이상이 38.2퍼센트, 80세 이상이 14.5퍼센트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어림짐작해 봐도 현재 얼마나 많은 노인들에게 치매가 큰 문제인지, 또 수십 년 안에 치매가 얼마나 중요한 건강 문제가 될지 가늠해 볼 수 있다.
70세 윤순이 할머니는 별다른 신체 질환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서서히 기억력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요리하기 위해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놨다가 태우는 일도 있고,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왜 나왔는지 잊어버리고 슈퍼에 가서 장을 본 후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가까운 거리에 살던 딸이 바로 옆 동네로 이사했는데, 자꾸 예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눌렀다가 무안을 당하거나, 딸의 집을 찾아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원래 말하기를 좋아하던 할머니가 이야기하다가 중간에 말문이 막히는 일이 잦아져서,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더라······"라면서 당황해하곤 했다. 아침 드라마를 즐겨 보는데, 최근 들어 드라마의 등장 인물이 출연한 다른 드라마와 헷갈려서 전반적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돈 관리가 허술해져서 거스름돈을 잘 받지 못해 손해 보는 일이 잦아지자, 보호자들이 결국 병원을 찾았다.
병력 청취, 우울증 여부를 포함한 정신건강의학과적 평가, 인지 기능과 실행 능력을 포함한 검사, 혈액 검사, 뇌 영상 의학적 검사 등을 한 결과, 할머니는 알츠하이머형 치매로 진단되었다. 치매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는데, 가장 흔한 것이 알츠하이머형 치매다. 1907년 알로이 알츠하이머가 처음 보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약 50~60퍼센트를 차지하고, 그다음으로 뇌의 혈관 이상에 의한 혈관성 치매가 많다. 그 외에도 루이체형 치매 등 다양한 치매가 있다.
치매를 평가하기 위한 도구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경 심리 검사다. 어느 영역이 얼마나 손상되었고 어떤 부분이 보존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원인 질병을 찾아내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집중력과 주의력, 장·단기 기억력의 학습과 유지, 언어 능력, 그림 그리기나 위치 찾기와 같은 시공간 능력, 가위를 사용하고 단추를 채우는 일 같은 일상생활 수행 능력에 중요한 실행 능력 평가, 물건을 만져 보고 무엇인지 맞히는 인식 능력, 판단력, 계획 세우기, 언어의 유창성 등을 포함한 전두엽 기능 등을 포괄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다른 지적 장애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 신체 질환을 찾아내는 작업을 놓쳐서는 안 된다.
간혹 우울증 환자가 기억력이 떨어졌다며 치매인 줄 알고 병원을 찾기도 한다. 우울증 환자는 인지 기능 검사를 할 때 쉽게 포기하고 문제를 맞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데, 기억력의 장애가 아니라 우울증에 의한 집중력 저하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울증에 의한 기억력 저하를 '가성 치매(pseudodementia)'라고 부른다. 노인성 우울증은 상대적으로 쉽게 치료가 되고, 회복되고 나면 처음 걱정했던 기억력 저하도 자연스럽게 좋아지므로 치매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치매의 흔한 증상들
가장 흔한 알츠하이머형과 혈관성 치매도 자세히 살펴보면 구별된다. 알츠하이머형 치매는 상대적으로 기억력의 장애가 서서히 진행되고 기억력이 뚜렷이 저하되어 전에 비해 유창하게 말하지 못하면서 행동 장애가 진행된다. 혈관성 치매는 혈관의 이상으로 오는 것이므로 타격을 받은 부위만 한순간에 기능이 떨어진다. 그래서 몇 달에 걸쳐 기능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이며, 말이 어눌해지거나 손발의 감각 이상이나 가벼운 운동 장애 같은 국소 신경학적 증상이 동반되곤 한다.
조기에 치매를 진단해서 치료를 시작해도 암 조직을 떼어 내는 것처럼 예전의 기능으로 금방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인도 명확하지 않고 확실한 치료법도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진행을 늦추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알츠하이머형 치매의 원인은 정확하지 않지만, 아밀로이드의 축적이 큰 요인으로 보고된다. 치매 환자의 뇌를 조직 검사하면 특징적으로 노인성 반(senile plaque)과 신경 섬유 매듭(neurofibrillary tangle), 신경 섬유의 손실, 시냅스 손실 등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MRI를 찍어 보면 대뇌 피질이 전반적으로 위축되어 있고,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손실된 경우가 많다. 특히 노인성 반은 알츠하이머와 깊은 관계가 있고, 이것이 많을수록 증상이 심하다.
신경 전달 물질로는 기억력과 관련된 아세틸콜린을 생성하는 신경 세포의 퇴화가 두드러진다. 대뇌에 아세틸콜린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의 농도가 떨어졌다고 보고 여기에 착안한 치료제가 개발되었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인지 기능 개선제인 콜린 분해 효소 억제제다. 그런데 아세틸콜린을 직접 주입하는 것은 부작용이 심해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아세틸콜린이 분해되지 않도록 막는 우회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몸에서 아세틸콜린 분해 효소가 작용하는 것을 억제하여 시냅스 내에 아세틸콜린이 오래 남도록 하는 것인데, 현재 상용되는 약은 도네페질, 갈란타민, 리바스타그민 등이 있다. 문제는 이 약이 뇌에서 아세틸콜린을 분비할 세포가 어느 정도 기능하고 있을 때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중증 이상으로 진행한 치매에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 외에 NMDA 수용체 길항제인 메만틴과 같은 약이 있고, 항산화제, 항염증제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베타아밀로이드 길항제로 작용하는 약이 개발되고 있다. 장기간 관찰하면 약물 치료를 받지 않은 사람과 비교할 때 확실하게 기능 저하가 더뎌진다. 그러므로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치료받기를 권한다.
그러나 기능은 서서히 나빠진다. 이럴 때에는 환자가 집에서 지내는 것이 나은지, 주간 보호 시설이나 요양 시설에서 전문적으로 간병을 받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일상생활을 영위할 능력이 점차 떨어지므로 병이 진행될수록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고, 환청, 망상, 수면 부족, 충동성과 같은 정신 증상이 함께 발생해서 많이 진행되면 대소변의 처리나 옷 입기, 식사와 같은 간단한 일상생활도 혼자 수행하기 어렵다. 이는 만성적인 문제이므로, 이로 인해 힘들어 하는 가족의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문제 행동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늘어난 수명과 행복한 삶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분명 축복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수명이 늘어나는 것이 꼭 좋지만은 않은 듯하다. 현대 의학의 힘으로 사망에 이를 위험이 줄어서 평균 수명은 100세에 가까워질 전망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뇌는 늘어난 신체의 수명을 끝까지 잘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건강한 후손들의 숙제다. 물론 앞으로 과학이 발전하면 치매를 예방하는 약물이 나올지도 모른다.
수명을 늘리기만 하면 행복할까?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3편에는 러그내그라는 나라가 나오는데, 스트럴드브러그라는 늙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 존재가 살고 있다. 그는 전혀 행복해하지 않는다. 스위프트는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갈망하지만, 아무도 나이 들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이지, 어떻게든 오래 사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도 떠오르겠지만 그보다 먼저 50년 후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때가 되면 치매가 당뇨병이나 고혈압처럼 인류가 오래 사는 한 겪어야 하는 천형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